동계(洞契)
그리고 마을 이름도 시냇가에 거북이 많고, 마을 지형이 마치 거북이 시냇물을 보고 기어가는 것 같다 하여 거북 구(龜)자와 시내 계(溪)자로 구계라 개명하였다. 구계 마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는 바로 동계(洞契)이다. 연종철(延鍾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는데, 현재『동계좌목(洞契座目)』과『동계책수불부(洞契策收拂簿)』가 남아있다.
동계에는 각 가호 세대주가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되어 있으며, 『동계좌목』은 동계 입의(立의)와 계원 명부(名簿)인데, 계원의 입출계와 샘물, 자(字) 등이 기록되어 있다. 마치 호적대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빛 바랜 표지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어 이보다 앞선『동계좌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계 자금의 지출은 마을의 공동 농기구 및 비료, 세금 등에 주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 보이는 격동기에도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도의 군사후원미(軍事後援米)와 1951년 이후의 응소자기념품대(應召者記念品代)는 한국 전쟁과 남북분단이 빚어낸 현상이다. 1986년 평화의 댐 성금은 당시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소를 자아내는 에피소드에 그친 사건으로 농촌에까지 현대 정치사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실제 동계 자금은 환난상휼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도록 마을 주민 또는 인근 주민의 구휼에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보릿고개를 연상할 수 있을 정도로 장리쌀을 많은 타지역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마을에서 장리쌀을 이용한 경우는 거의 보이지 않아 다른 마을에 비해 구계 마을은 비교적 윤택했던 것 같다.
원래 곡산연씨의 세거지는 화성리 상작으로 지금 주민들의 고조·증조대에 구계로 많이 이주했다고 한다. 현재 구계 마을에는 안음공파·작달파·눌문파· 금당파 등 곡산연씨 세계의 다양한 분파가 거주하고 있다. 이들 분파는 도안면의 곡산연씨 입향조 사직공(司直公)정(挺)의 여섯째, 일곱째 아들로 정복(定福)과 정원(定遠)에서 분파한 것이다. 마을에서는 분파에 관계없이 곡산연씨라는 공동체로 모두가 친척이라는 인식으로 사이좋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