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숲에 칠해진 바람의 빛깔
증평 보강천 생태공원
이파리들이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드문드문. 그마저도 한발 다가온 동장군이 땅바닥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한 잎, 또 한 잎. 아, 이제 가을의 끝자락이구나. 얼마 남지 않은 올해의 따스한 햇볕과 포근한 바람을 그냥 떠나보낼 수 없다. 가을에게 “안녕” 인사라도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집을 나섰다. 김밥 한 줄 싸 들고 증평으로 향했다.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증평군 보강천 생태공원을 찾았다. 가을의 끝자락이 채 가시지 않은 선선한 바람이 강물을 거스르고 있었다. 증평의 보강천. 이 긴 강물은 증평군 시가지 일대를 가로지르는 지역 젖줄이다. 7080세대들은 이곳에서 물놀이나 야영을 즐겼을 것이다. 주민 한 분의 말에 따르면, 마을 행사가 간혹 열리는 날에는 전통놀이와 씨름판이 벌어져 승부를 겨루고, 너도나도 얼싸안으며 가락에 취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흘러가는 보강천은 단순한 강줄기가 아닌, 지역민들의 추억이자 애환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보강천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90년대부터였다고 한다. 생태공원화 사업이 시작되며, 점차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 현재는 운동·체험시설, 산책로 등이 조성되어 군민들의 문화생활·건강증진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넓은 습지에 수생동식물도 풍부하고 겨울철에는 철새들도 찾아올 정도라니, 생태공원으로서의 몫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보강천에 새 바람이 불고 있었다.
보강천 가을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며 걷다 보니 해는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허기도 슬슬 재촉하기에 잠시 앉아 쉴 곳을 찾기로 했다. 강을 따라 걷고, 먼지바람 날리던 운동장을 지나자 넓은 공원이 나타났다. 놀이시설과 예쁜 구조물들이 어설프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초병처럼 서 있었고, 색색의 국화밭이 융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거대한 미루나무가 에워싸며 군집해 있었다. 보강천 미루나무 숲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울창한 미루나무가 바람에 머리를 풀어헤친다. 흘러간 옛사람들의 추억과 애환을 지켜보며 수천 번은 풀어헤쳤으리라 짐작될 만한 거목들이었다. 미루나무 밑에 자리한 그네의자에 중절모나 선글라스로 멋을 내거나, 연분홍 외투를 걸친 어르신들이 무리 지어 찾아오셨다. 나들이를 나오셨는지 돌아가며 그네의자에 앉아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 분주했다. 다른 저편에서는 놀이시설을 오르내리는 두 아이, 몇 걸음 뒤에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부모로 보이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날씨도 좋았고, 사람들의 기분도 그래 보였다. 그날 보강천의 추억이 또 한 겹 쌓여가는 듯했다. 평온함 속에 나는 김밥을 우적우적 해치웠다.
오후가 시작되고 가장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시간, 햇살을 등에 업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선선한 날씨 속 걷기에 무리는 없었지만, 자전거가 있으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 도로가 천변을 따라 말끔히 깔려있었다. 그중 일부는 증평에서 열리는 MTB(Mountain Bike) 대회 코스로도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증평은 매년 MTB 대회가 열릴 만큼 자전거를 타기 좋은 지역이라고 한다. 다음에 이곳에 올 땐 자전거를 타봐야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둑방 위로 올라 강줄기를 따라 걸어보았다. 샛노랗게 완연히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가 들어선 산책로였다. 바닥에 깔린 은행잎들을 노란 카펫 삼고, 강줄기를 내비게이션 삼아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을 것이다. 보강천 습지 일대에서 떠나가는 가을바람, 드넓게 펼쳐진 그 바람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바람은 갈대 위를 달리며 저마다의 방향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가르마를 어느 방향으로 탈지 고민하는 남자의 머리숱처럼 갈대들의 고개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렸다. 바람에 휘감기고 햇볕에 그을리며, 제 색의 소박함을 넓게 펼쳐 보이고 있었다.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의 OST 중 ‘바람의 빛깔’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떠올랐다. “바람의 빛깔이 뭔지 아나요~♪ 바람의 저 아름다운 빛깔을~♬” 누군가 바람의 빛깔을 물어본다면, 증평에서 그 풍경을 마주한 그때부터 적어도 가을에 부는 바람의 빛깔은 어떤 색인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 광경이 내게 납득할 만한 답을 주었다. 울림 있는 답변이 된 바람의 빛깔을 따라, 보강천을 따라 들뜨는 발걸음을 한참 옮기고서야 그날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붉은 단풍, 노란 은행나무, 연분홍의 코스모스. 자연 속에는 원색으로 가을의 빛깔을 발현하는 것들이 많다. 그것들의 몫이 화사함과 경쾌함으로 가을을 맞이하는 것이라면, 갈대의 몫은 소박함과 둔중함으로 가을 끝자락을 매듭 짓는 것이 아닐까. 온몸 길게 뻗은 것도 그것을 위함일 것이라고, 돌아오는 길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에게 한가롭게 바람을 맞으며 걷고 싶은 어느 가을날이 찾아온다면, 그땐 꼭 보강천에 가보라고 전하고 싶다. 누구와 걷든, 어떤 기분으로 걷든 보강천은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우리를 맞이하리라. 재회하고 싶은 가을 보강천의 빛깔에게 안녕을 고한다.
[증평 보강천 생태공원]
- 주소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인삼로 일원
- 전화043-835-34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