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을은 수십년 전 만해도 100여호가 사는 꽤 큰 마을이었다. 도안면에서 체육대회를 할라치면 언제나 이 동네에서 우승을 하여 도안면에서 막골을 당해 낼 마을이 없었다고 한다. 그 때는 우승 기념으로 '공'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장을 보러 가면 도안 사람을 무시할 수 없어 반드시 타동리 주민들이 술을 사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자신은 굶어도 자식들은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교육관을 가진 주민들이 대다수였기에 이 마을에는 도안면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곳이기도 하여 주민들의 자긍심이 대단하다.
도당 2리가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재 이 마을의 대성을 이루는 곡산 연씨가 거주하기 전에 이미 조씨네가 살다가 이주한 것으로 보아 추정컨대 350여년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마을은 남쪽에서 내려온 산맥이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는데 동쪽 끝은 '조개물뿌리 '라고 부른다. 이 마을에 조씨네가 살았으며 묘가 그곳에 있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현재 그 묘는 이장하여 볼 수 없다.
조씨가 살다가 곡산 연씨가 이후 자리를 잡았는데 그 입향조는 연세붕(延世鵬, 1665-1712)이다. 연세붕은 연사종의 9세손으로 금당에 입향한 준수(俊秀)의 증손이다. 준수가 금당리 일대에 자리를 잡게 되자 그의 자손 역시 점차 이 지역에 거주지를 확대해 가면서 도암으로 입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곡산 연씨가 이 마을에 입향한 시기는 300여년 되었으며,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더 거슬러 올라간다.
이 마을은 여전히 곡산 연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으며, 타성이 있기는 하나 입주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