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살단
하다못해, 장내마을에서 지금의 율리저수지 가운데쯤, 나무숲과 돌무더기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물을 막아 주십사’ 하고 ‘수살(水殺)막이’고사를 올렸다. 그에 더해 삼거리에도 나무숲과 돌무더기가 있는 ‘수살막이’가 있어서 여기에도 고사를 올렸더니 그 후부터 물난리는 사라졌다 한다. 이런 연유로 ‘윗수살막이’와 ‘아랫수살막이’가 탄생한 것이다.
귀신도 남녀가 있어야 편안하다던가. 마을 사람들은 위에 있는 수살막이를 숫수살이라고 했고 아래 있는 것을 암수살이라고 하여 암수를 구분하였다. 그리고 제를 지낼 때 숫수살에게 먼저 제를 올리고 암수살에게 제를 지냈다 하는데 예의 남존여비사상(男尊女卑思想)은 신을 정함에도 적용(適用)된 것일까? 아니면 순차의식(順次儀式)일까? 아무튼 고사를 지낼 때 먼저 위에 있는 숫수살제를 지내고 아래로 내려와서 암수살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후, 병술년(丙戌年). 증평군 일대는 큰 장마에 휩싸인다. ‘증평군의 최고봉(最高峰) 두타산 봉우리만 남기고 그 일대는 물에 잠기는 대홍수(大洪水)가 있었다. ’배넘이 고개‘는 이 대홍수 때 배가 넘어 다니던 고개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야말로 천지개벽(天地開闢)의 대홍수였다. 그 와중에 위에 있던 숫수살이 홍수에 떠내려와 암수살 곁으로 와서 멈추었다는데 마을사람들은 숫수살이 암수살 옆에서 멈춘 뜻은 남자가 여자를 찾아 온 천리(天俚)라 생각하였고 그 때부터 현재까지 숫수살과 암수살이 같이 지내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숫수살이 암수살 곁으로 떠내려 온 이후 동네사람들은 암컷을 찾아온 수컷을 다시 제자리로 보낼 수 없어서 동쪽의 숫수살과 서쪽의 암수살을 양쪽으로 놓고 현재도 고사를 지낸다. 수살제는 매년 정월 열나흘 자정에 고사를 올리고 있는데 먼저 숫수살에게 고사를 올린 후 암수살에게 고사를 올린다.
이후 흉년이 들거나 동네에 불길한 일이 발생하면 정월, 수살단에 고사를 지낼 때 정성이 부족하거나 유사(有司)가 부정이 탄 것으로 알고 다음해에는 더욱 정성을 들여 고사를 지내고 있다.